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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로안 일기

2021, 12, 21 화요일 (맑음)

2022.01.02 10:54

건우지기 조회 수:164

나는 배를 잃었다.
세상을 삼켜버릴 것 같은 바람과 파도가 저지른 일이다.
12년동안 필리핀에 살면서 아니 지금까지 세상을 살면서 가장 무서운 태풍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마음이다.
내가 지금까지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은 못했어도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나인데 왜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주는 지...
건우호는 유일한 나의 자랑이었다.
정말 누구보다도 안전하고 크고 편한 멋진 배를 만들고 싶었고 그 욕심에는 부합되지 않지만 많은 분들이 우리 배 건우호를 사랑해 주셨다.
그동안 배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눈앞을 스친다.
가장 어렵게 힘들게 만든 배인데.
사기를 당해 엉망으로 만든 배를 이곳으로 끌고와 두 번의 대수술을 거치면서 생각하기조차 싫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했고 얼마 전 간단한 수리와 배를 건조시킬 목적으로 해안에 근접하여 묶어 놓았는 데 태풍도 아닌 데 높은 파도가 쳐서 해안으로 좌초되어 5개월이란 시간을 직원들이 배에서 숙식을 하며 하루하루가 전쟁같은 시간을 보내며 가까스로 배를 구조했고 배의 옷도 다른 색으로 단장하고 하는길이 열리기를 학수고대 했건 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모습으로 내앞에...
아예 이럴 것이었으면 그 때 그랬으면 덜 억울할 것이라는 자조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참으로 속상하고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다.
나의 실수다.
직원들의 고초를 잠깐 잊어버리고 단호히 피항을 하라고 명령했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배를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바이스로 피항을 가면 나름대로 그곳에서도 어렵다고 하여 순간적으로 나의 마음이 흔들려 그러면 하늘의 뜻에 맡기자고 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 누구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모든 책임이다.
너무나도 큰일이라 화도 나지 않고 눈물도 나지 않는다.
그저 직원들이 약간의 부상만 당하고 돌아와 준 것이 고마울 뿐이고 이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한다.
배의 앞머리가 부서지고 침몰직전 배에서 탈출하여 무서운 파도를 헤치고 해안으로 나와주었다.
지금도 직원들은 배에 매달려 무엇 하나라도 건져보겠다고...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파 나는 배 근처에 가는 것이 두렵다.
거의 1주일 다 된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상황이 두렵고 무섭다.
자연앞에 인간의 힘은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방앞에서 야자수가 거침없이 휘어지며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이미 나는 직감했는 지도 모른다.
만약 커다란 만조 때 이 태풍이 몰아쳤다면 그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하기사 더 이상 당할 큰 피해도 없다.
웬만한 피해는 피해도 아니다.
보홀은 70% 정도가 배를 잃었고 세부 막탄도 이루 헤아릴 수 없도록 피해를 입었고 이곳 릴로안도 모든 한인샵들이 배를 잃어 큰 슬픔과 좌절, 절망적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서 복구에 여념이 없다.
눈을 마주치면 힘을 잃은 눈동자를 보기가 안쓰러워 서로 시선을 피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는 것이다.
밀치면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서로를 의지하고 달래며 쓴 소주 한 잔을 건낸다.
거의 2년동안 필리핀에 남아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 데.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이번에 믿기로 했다.
하늘에 맡겼으니 순종해야 겠지.
그래도 그래도 여운이 남는 것은...
직원들 앞에서는 나는 늘 당당하고 대범해 보이고 강인함을 보여주는 데 지금은 직원들 몰래 혼자 방에서 소줏잔을 기우리고 아침에는 표시나지 않도록 치운다.
잠시 알코올의 힘을 빌리고 있다.
지금 포기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다.
내가 처한 상황을 잘됐다는 심정으로 보는 사람도 두세 명 있을 수도 있겠으나 나를 아는 거의 모든 분들이 같이 걱정해 주시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걱정해 주신다고 하셔서 이렇게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차마 내 스스로 참혹한 현장의 사진을 보여드리지 않을려고 수백 번을 고민끝에 이렇게 보여드리기로 마음 먹었다.
자랑스러운 사진도 아닌 데 뭐하러 보여주느냐고 하시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도 나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필리핀에 살고 있는 지인들에게 안부의 소식이라도 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곳은 지난 수요일부터 지금까지 정전되어 밤이면 암흑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정전이 1개월 이상 지속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수돗물 공급도 제대로 안 돼 주민들이 물통을 들고 물을 구하기에 정신이 없다.
통신망도 많이 파괴되어 어제부터 서로 연락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정전이 되어 휴대폰 충전을 못해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발전기를 돌려 휴대폰을 충전해 주고 돈을 받는 가게도 생겼으나 주유소에 연료공급이 안 돼 휘발유와 디젤을 사기 위해 주유소 문이 열리기 전에 줄을 서있고 운행도 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전쟁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내년 초까지 크리스마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항구는 장사진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을 보고있다.
지금 나도 그들의 행렬에 속해 배를 3시간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내 차가 주저앉을 수도 상태로 짐을 싣고 두마게티로 향하기 위해서다.
파손된 배에서 3일간 엔진을 수거하여 차에 싣고 수리를 해 보려고 그 행렬에 동참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렇게 배를 기다려도 짜증나지 않는 모습이 나와는 대조적이다.
평소에는 두 대의 배가 오고가고 했는 데 지금은 배 한 대만 움직이니 최소 4시간 이상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정말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
이제 날이 조금씩 어두워 지고 있다.
오후 1시에 항구에 와서 지금 오후 4시가 넘었는 데도 건너편 항에서 아직 배가 출발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에서 배에 차량을 가득 실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인가 보다.
이곳은 차량들이 긴행렬을 이루며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데 배시간도 지키지 않고 회사의 욕심만 채우겠다는 심산인가 보다.
이런 곳이 필리핀이다.
이들의 의식이 바뀌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정말 답답하다.
차량에서 휴대폰을 충전하며 나와 직원들의 무사함을 나를 아는 모든 분께 전해 드린다.
과연 지금 내가 쓴 글이 업로드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냥 쓰자.
다시 한 번 걱정해 주시는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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